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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카게른] 단문 리퀘글 모음

 

 

 

1. 쿠니카게, 손가락 (for. 복순님)

 

*키타이치 시절의 쿠니카게

 


   어느날부터 그 애의 손톱이 일정한 길이로 자라있었다. 틈만 나면 손가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손톱을 부딪혔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손가락의 아랫면을 간지럽히듯 긁고, 손바닥을 희롱하듯 쓸어도 그 애는 싫다는 내색 한 번 없었다. 배구 할 때마다 오차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단히 가꾸어 온 것이었는데도. 문득 궁금해졌다. 카게야마. 너 손톱 안 잘라?

   우습게도 그는 중요한 비밀을 들킨듯 화들짝 놀란다. 눈밑이 금방 발개지고, '그…… 저기……' 와 같은 답답한 소리를 내뱉는다. 결국 그는 곤란한 얼굴와 함께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더이상 보채지 않았다. 여전히 카게야마의 손을 주물거리는 채였다. 너 나랑 이러는 거 좋아서 그렇지. 손가락 만지고. 손톱으로 장난치고. 밖으로 말하지 않고 눈으로만 전했다. 

   기다란 손가락을 아래위로 기묘하게 쓸어댔다. 그의 손톱으로 내 살점을 긁게 하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잔뜩 붉힌 채 뒤엉킨 서로의 손만 내려다 본다. 끄트머리가 벚꽃색으로 물든 손가락과 희미하게 튀어나온 그의 아랫도리를 보고 무심코 생각한다. 핥고 싶다고.

 

 

 

 

 

2. 우시카게, 벚꽃 데이트 (for. 다린님)

 

 

   오랜만이다, 카게야마.

   동네 자판기에서 뽑은 우유를 쪽쪽 빨고 있던 카게야마의 머리가 한순간 팍 들렸다. 마치 무수한 별을 박은듯 반짝거리는 눈이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남자친구이자, 두 살 연상의 배구부 에이스였다.

   워낙에 학교 간의 거리가 멀고 서로 배구연습으로 바쁜 입장이라 그들은 사귄 지 일주일이 넘었음에도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카라스노의 배구부가 휴식을 가지는 날엔 꼭 시라토리자와가 연습을 하는 날이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우시지마는 주장의 자리에 있었기에 대충 둘러대고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둘의 인생이 배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배구는 배구. 둘은 크게 티를 내는 성격은 못 돼도 서로를 정말 못견디게 좋아했다. 그러니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얼굴 한 번 못 보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 매일밤 자기 전 담백한 통화를 하는 것 또한 좋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엔 금요일, 카게야마가 우시지마에게 먼저 연락했다.



   「여보세요? 우시지마 씨?」
   「그래, 카게야마. 잘 지내나.」
   「그럼요, 저야 뭐……. 우시지마 씨는요?」
   「평소와 다를 바는 없다만……. 무슨 일이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나요. 카게야마가 불퉁한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우리 인터하이 이후로 못 본지 꽤 됐어요.」
   「그렇군.」
   「그러니까, 우리 주말에만 시간 나잖아요! 저 안 보고 싶으세요?」
   「당연히…… 보고 싶다.」



   저도 눈치 없기로는 한 몫 하지만 그보다 더 눈치 없는 애인이 답답했던 카게야마는 보고 싶다는 그의 한 마디에 그만 뚱했던 표정을 그만 풀어버렸다. 눈밑 그 언저리가 붉게 물들고, 입꼬리가 웃을듯 말듯 넘실대기도 했다. 그럼 우리 내일 만나요. ○○공원 앞에서. 목소리도 조금 들뜬듯 떨렸다.

   우시지마는 예와 같이 그래, 하고 담백히 대답했고, 전화는 끊겼다. 카게야마는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침대 위로 벌렁 몸을 던져 한참을 데굴데굴 굴렀다. 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봐 놔야지. 이번에 보고 나면 또 다음 주 주말이 오기 전까진 전화로 만족해야 할 터였다. 잔뜩 긴장한 마음은 카게야마가 늦게까지 잠을 설치도록 방해했다.

   그렇게 카게야마가 소리없이 요란한 밤을 보낸 후에야, 드디어 그들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 아래서 만날 수 있었다. 벤치에 얌전히 앉아 흩날리는 꽃잎을 조용히 감상 중인 둘 사이에 좀처럼 오가는 말은 없었으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날뛰는 심장을 주체하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어젯밤부터 잔뜩 긴장한 탓에 빨대만 자근자근 씹던 그가 옆을 힐끗 보면, 정자세로 앉아 여태 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애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불편한가?"
   "네?"
   "빨대 말이다."



   고개를 갸웃, 하며 빨대를 보면 하도 씹어대 완전히 납작해진 입구가 보였다. 아, 이상해 보이겠지……. 괜히 부끄러워진 기분에 뒷통수를 헝크린다. 하지만 머리칼은 다시 단정해졌다. 따뜻하고 두꺼운 손이 그의 뒷머리를 정성스레 정리해 준 탓이었다.

   별뜻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카게야마는 충분히 부끄러웠다. 저 두툼한 손을 잡고, 자신의 볼을 부비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아래만. 빨대는 이미 완전히 짓이겨져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뜨끈하고 부드러운 손이 다시금 저에게 닿자마자,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며 옆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배경의 벚꽃잎처럼 함께 물든 그가 카게야마의 뺨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좋군. 원한다면 우유를 더 사다주겠다."
   "네?"
   "여기서 기다려라."
   "자, 잠깐만요!"



   우시지마의 옷자락을 급히 붙든 카게야마가 그를 자신쪽으로 당겼다. 여전히 엉뚱하고 실행력 높은 애인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저는 지금 이대로 딱 좋으니까요. 카게야마가 용기 내어 그의 양볼을 감싸고 훅 잡아당기자, 둘의 얼굴이 서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그 좁은 허공에 함께 뒤얽혔다. 얼굴에 오른 열기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붉은 입술 두 개가 맞물릴듯 말듯 아슬아슬해졌다. 
   우유 말고, 더 좋은 거 해요.

 

 

 

 

 

3. 쿠니카게, 재벌 혐관 (for. 영재님)

 

 

   주인의 이미지 답게 잘 빠진 검은색 고급 외제차 한 대가 쿠니미 정문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에 저택 앞을 지키던 사람들 중 가장 앞에 있던 이는 차가 서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가 뒷좌석 문을 신속하게 열었다. 그리곤 깊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오십시오, 카게야마 도련님."

 

 

 

 

   일본에서 가장 큰 전자회사 3군데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는, 카게야마 의 외동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의 등장이었다. 수입 원단으로 자체 제작했을 고급 회색 수트와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옥스퍼드화, R사에서 한정적으로 판매했다는 몇 천만원대의 시계 그리고 포마드로 말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까지. 눈에 띄는 색은 쓰지 않았지만 척 봐도 품격 높은 외관이었다.

 

   그는 저택의 직원들에게 짧게 고개만 숙여보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정장 자켓의 단추를 푼 뒤, 빠르게 주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들어서자마자 많은 이들이 귀신같이 들러붙어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기 바빴으므로 그의 앞은 금방 막히고 말았다. 오랜만이에요, 카게야마 군. 저번에 한 계약은 어땠나요? 카게야마는 일일이 대답하지 못한 채 인파를 뚫는 데에만 집중했다. 파티장 안에서는 개인 요원이나 비서를 대동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엔 꽤 오랜시간이 걸려 겨우 혼자 남게 된 후에야 그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은 대체 어디있는 거야? 너무 지친 나머지 아버지가 들으면 호되게 혼내실 정도로 신경질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나 찾는 거야?"

 

 

 

 

 

   어, ?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카게야마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곳에, 그가 지금껏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티의 주인공이 아무렇지도 않게 벽에 기대어 있었다. 사람들이 좀처럼 들여다 보지 않는 통로였다.

 

  

 

 

   "……너 거기 있어도 돼?"

   "뭐가."

   "뭐기는……."

 

 

 

 

   오늘 네 생일파티 아냐? 주인공이 여기 있어도 되냐고. 그에 쿠니미가 픽, 실소를 흘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걱정을 해줬다고?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카게야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물론 카게야마는 자신의 어깨에 그의 팔이 닿자 불쾌한듯 날카롭게 쳐냈다. 그러나 팔은 다시금 올라왔다. 너무 박하게 군다 너. 쿠니미는 그 상태로 그를 그대로 끌고 사람들이 많은 중심으로 데리고 갔다.

 

    

 

   "뭐 하는 거야?" 

   "너 나랑 눈도장만 찍고 대충 빠져나가려고 했지?" 

   "이거 안 놔?" 

   "너네 아버지께 그렇게 말할거야, 너 내 생일파티에 얼굴 한번 안 비췄다고." 

   "씨바……!"

 

 

 

 

   쉿. 저기 네 팬들이 오잖아. 쿠니미가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볍게 대며 속삭였다. 정말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까 카게야마가 피해다녔던 사람들이 다시 몰려 오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있다 갈 거였으면서 옷은 왜이렇게 차려입었대?" 

   ", , 조용히 안 해?" 

   "역시 너도 오래 있따 가고 싶은거지? 나랑. 아직도 숫기가 없어-"

   "이게!"

 

 

 

 

   쿠니미의 놀리는 말투에 평소처럼 버럭 화를 내려던 카게야마는, 어느새 코앞까지 와 자신의 팔을 붙드는 사람들에 의해 금세 조용해졌다. 그들은 쿠니미와 카게야마 두 사람 모두에게 인사하며, 생일 축하한다느니 다음에도 함께 계약하자느니 뻔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카게야마는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가 꿈쩍도 못할 정도로 어깨를 콱 쥔 쿠니미의 손만 아니었더라면. 수트의 어깨선이 구겨질 것 같았다.

 

 

 

 

"이거 나……. 스트 믕그지그덩?" 

"변상하면 되지. 우리가 돈이 대수야?" 

"카게아마 군! 안색이 안 좋은데요?"

 

 

 

 

쿠니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불평하던 카게야마는 그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금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괜찮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 쿠니미가 또 한번 웃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번 카게야마 자신만 놀림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4. 키타카게, 토비오를 두고 눈치싸움 하는 키타이치 (for. 눈사탕님)

 

 

 

 

   어,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카게야마 토비오 입니다. 올해로 열 넷이고요, 그리고 음…… 배구를 좋아합니다. 그런 저에게 요근래 정말 심각한 고민이 생겼어요. 부디 끝까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 미야기 현에서 배구로는 가장 강호라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초등 시절 대부분을 공과 함께 보냈으니 배구부에 입부 신청을 넣은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죠. 다행히도 제가 나온 초등학교에서 추천장도 넣어준 덕에 별 탈 없이 입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 고민에 빠뜨리게 한, 문제의 배구부원들을 만나게 되었어요-오해는 마세요,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부에 와서 처음 친해진 친구는 킨다이차 유타로였어요. 아직 중학생 1학년인데도 여느 2, 3학년 선배들과 맞먹을 정도로 키가 큰 친구입니다. 신입 부원들 사이에서 비교적 활발하고 호탕했던 그는 제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어요. 안녕, 키미가와 초에서 온 킨다이치 유타로야. 저보다 훨씬 큼지막한 손을 불쑥 내밀었었죠. ……나는 아키야마에서 온 카게야마 토비오. 어색하게 맞잡던 날이 아직도 선명합나다.

   

   그 다음으로 친해진 것은 킨다이치의 친구라는 쿠니미 아키라였어요. 킨다이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입부할 때부터 늘상 붙어있길래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무표정한 얼굴이 달라지는 때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정도일까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그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킨다이치와 제가 친해진 게 싫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한동안 그들을 피해다닌 적도 있었답니다. 지금에서야 모든 오해가 풀렸지만요. 아무튼 그 또한 활기차진 않아도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두 학년 위로는 우리 배구부의 주장인 오이카와 씨와 이와이즈미 씨가 계십니다. 얼마 전 복도를 지나다 그 두 사람이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 말은 정말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둘은 정말로 친해보였거든요. 대충의 눈치만으로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채고, 매일 서로를 놀리지만 배구를 할 때만큼은 정말 끝내주게 화합을 맞추더라고요. 도저히 1, 2년 친구인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도 킨다이치와 쿠니미가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이카와 씨는 제가 근래 가장 닮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서브 실력은 가히 굉장했습니다. 처음 체육관에 발을 들여다 놓았을 때, 때마침 그가 공중에 날아올라 코트 반대쪽으로 공을 강하게 내리쳤었죠.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안을 잔뜩 뒤흔들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문을 연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한참을 공이 떨어진 곳만을 응시했습니다. 거기서 눈을 떼기란 어려웠어요. 배구 경기장 관람석도 아닌 체육관에서, 그것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대단한 서브를 제 두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서브 요령을 알려달라며 열심히 오이카와 씨를 따라다닌 것도 아마 이때쯤부터였을 겁니다.

   

   이와이즈미 씨는 우리 부에서 가장 든든한 분이세요. 그 분의 스파이크도 단연 멋지지만,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팀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죠. 이게 생각보다, 팀에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더라고요. 얼마 전 다른 학교와의 연습경기에서도요. 쟁쟁한 상대를 만나 자꾸만 길어지는 경기에 상대팀과 우리팀 모두 많이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거기서부터는 거의 정신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날 우리팀은 멋지게 이겼습니다. 바로 이와이즈미 선배 덕에요. 그 분은 숨만 겨우 고르고 있는 우리에게 멋진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배구는 여섯이서 하는 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오이카와 씨는 알고 계신 눈치였습니다. 그에 다시 의욕을 되찾은 그 사람은 이와이즈미 씨와 함께 팀을 다시 이끌었고, 덕분에 그 날 우리팀은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죠.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저는 요즘 이 네 사람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느껴집니다. 여전히 멋진 사람들이지만, 왠지 입부 초반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달까요. 그런데 그게 하필, 저와 깊게 관련된 무언가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어요.

 

   어제만 해도 그래요. 그날 있었던 일들, 그러니까 사소하지만 제게는 온통 이상하게 보였던 것들을 말해주고 싶네요. 저희 부는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늘 부원별로 스포츠 드링크를 한 통씩 배부받는데요, 이 사람들이 글쎄, 제가 없는 동안 제 드링크로 티격태격대고있질 뭡니까.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 , 토비오 쨩! 이건 말이지-" 

   "오이카와 선배가 네 드링크를 은근슬쩍…… !" 

   "안 돼, 쿠니미 쨩! 그만해 그만!"

 

 

  

   뭔지는 몰라도 오이카와 씨가 제 드링크로 뭔가를 하려던 것 같았습니다. 쿠니미가 뭔갈 더 말하기 전에 오이카와 씨가 그의 입을 막아버렸으니 무슨 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수상쩍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눈쌀을 잔뜩 찌푸리고 오이카와 씨를 노려봤는데, 아니 글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지 뭡니까?

 

 

 

   "뭐야, 그 눈은? 토비오 쨩 지금 날 변태라고 오해하고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소립니까? 변태라니요? 그런 짓 하고 있었던 겁니까?" 

   "……! '그런 짓' 이라니,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니미는 그의 얼굴을 잠시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 부실을 나갔습니다. 그의 반응에 더 민망해하는 오이카와 씨의 얼굴은 정말 홍당무 같았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어요.

 

   저는 결국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찝찝한 기분으로 드링크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제 게 왜 오이카와 씨의 손에 있었는지 묻고 싶어도, 그는 절대 대답해 줄 마음이 없었거든요. 사실 이 일 말고도 제 수건이나 무릎보호대 등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몇 번 보았지만, 구태여 뭐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못 했죠. 제가 말을 걸기도 전에 그쪽이 저를 먼저 알아보고는 다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으니까요. 서브 좀 알려달라 할 때도 싫다며 놀리기나 하고. 비밀이 참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이와이즈미 선배 이야기예요. 이 분은 나머지 셋에 비하면 평범하다고 할 정도기는 하지만... 확실히 학기 초와는 다른 구석이 많으니 빼놓을 수는 없겠네요. 앞서 말했듯 이와이즈미 씨는 제가 느끼기에 팀에서 가장 든든하다고 느끼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의 그런 점을 늘 닮고 싶다고 생각해 왔고요. 그래서 다른 중교와의 합숙 날, 모두가 자기 위해 불을 끄고 막 잠이 든 시간에 옆자리에 누운 그에게 나지막히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이즈미 씨는 참 든든한 분이세요. 선배가 아니었다면 우리 배구부가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을까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 

   "그래서 예전부터 참,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요." 

   "..."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 이후로 말 없이 눈만 감고 있었죠. 그러다 자연스럽게 잠이 몰려왔습니다. 꿈 속에서 들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 저는 저의 말에 분명 다른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 잘못들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확실히 그 날을 기점으로 이와이즈미 씨가 저에게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우선 부실에 와 캐비넷 문을 열면, 늘 제가 좋아하는 군군 요구르트 한 팩이 놓여 있었습니다. 꼭 무언가 적힌 포스트잇과 함께요. 내용은 별 것 없었습니다. 먹고 열심히 해라. 오늘도 열심히 해라. 어쨌든 저쨌든 열심히 하라는 말만 적혀 있었어요. 쪽지에 누가 쓴 것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저는 그것이 이와이즈미 선배의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가끔 오이카와 씨 대신 이와이즈미 씨가 부활동 로그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개성이 강하고 성격답게 강직한 글씨체가 그가 주인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요구르트가 다는 아니에요. 그는 휴식시간에 저에게만 살뜰히 수건을 챙겨주기도 하고, 무심코 제 볼을 주욱 늘여보다 혼자 깜짝 놀라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 씨가 저를 놀릴 때면 본인이 더 크게 화를 내시기도 하고-전에도 저를 감싸주시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성을 내신 적은 없었습니다-심지어이렇게 잘 대해 주시니 분명 제가 그 말을 한 이후로 저를 좋은 후배로 봐주시는 것 같기 한데, 그게 좀…… 남을 대할 때와 차이가 좀 있달까요. 오죽하면 킨다이치가 입을 비죽 내밀고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이즈미 씨, 요즘 너무 카게야마만 챙기시는 거 아냐?"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작게 끄덕이는 쿠니미의 얼굴도 보았어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듯 했습니다. 그래서 당일 부활동이 끝난 후 바로 물어보았어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이와이즈미 선배."

   "-" 

   "요즘 왜 이렇게 챙겨주세요?"

   "으읍…… 푸학-!!!"

   "! 괜찮으세요? 잠깐만요!"

 

 

 

   그는 제가 질문을 하자마자 마시던 음료에 사레가 걸려 켁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등을 두들겨드리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죠.

 

 

 

   "……갑자기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 

   "킨다이치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느낀대요." 

   "……기분 탓일걸."

 

 

 

   그런가요. 저의 말에 이와이즈미 씨는 더 이상 말이 없으셨습니다. 아까 걸린 사레 때문인지 목까지 발개져 있었죠. 저는 괜히 불편케 해드린 것 같아 조용히 인사하고 부실에서 나갔습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어쩌겠어, 하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의 친절은 다음 날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주 조금 덜한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요. 그래도 미움 받는 것 보다는 나은 거겠죠?

 

 

 

   다음은 킨다이치와 쿠니미의 이야기예요. 배구부에, 아니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친해진 친구들. 숫기 없는 저에게 먼저 다가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들이 저와 함께 밥을 먹고, 같이 하교를 했죠. 솔직히 제 인상 때문에 중학교에서도 초등학교 때처럼 혼자 다닐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뜻밖의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 둘도 요즘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뭐랄까, 킨다이치와 쿠니미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사실 그보다는 킨다이치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이었어요-이 있는 것 같달까요. 물론 그렇다 해서 사이가 안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전히 장난도 잘 치고, 잘 웃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신경전이라는 게 참, 요상한 데에서 일어나더라고요.

 

 

 

   "카게야마. 너 오늘은 나랑 집 가자."

   "무슨 소리야 쿠니미! 왜 나는 빼는 건데!"

   "너 어제 카게야마랑 둘이서 갔잖아."

   "?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다고!"

 

 

 

   서로 저와 함께 집을 가니 마니, 당사자인 저는 가만히 있는데 둘이서 티격태격대질 뭡니까. 대체 너희들까지 왜 그래? 중간에서 말렸지만 그들은 그대로였습니다.

 

 

 

   "좋아. 셋이서 같이 가자. 그럼 된 거잖아?"

   "되긴 뭐가 돼. 너 어제 킨다이치랑 둘이서만 갔잖아. 오늘 셋이서 가면 내가 손해야."

   "손해라니……?"

 

 

 

   저는 정말로 몰라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손해라는 이야기죠? 쿠니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결국 혼자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나랑 카게야마가 같이 가. 내일 셋이서 가든지."

 

 

 

   그는 킨다이치와 제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종소리와 함께 교실을 나갔어요. 웬만해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쿠니미였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안 저는 그저 킨다이치를 도닥여 그의 반으로 보냈습니다. 그날은 당연하게도 저와 쿠니미만이 함께 하교했죠.

 

 

 

   하교하는 내내 쿠니미는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평소와 정말 똑같았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갔죠. 너 아까 왜 그렇게까지 둘이서 간다고 그랬냐?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저를 향했어요.

 

 

 

"눈치가 없는 건 알았지만……." 

", 너는 무슨 설명은 하나도 없이……!" 

"다 왔네. 내일 보자."

 

 

 

   그 애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우리는 어느새 저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제가 무어라 말을 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고 집을 지나쳐가는 그의 뒷머리가 가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나와 같은 가쿠란. 나와 같은 흑발인데도 어쩐지 그 애의 것은 달라 보였어요. 저는 무심코 제 뒷머리도 한번 쓸어보다, 결국 그 무엇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이 말고도 이 네 사람의 이상한 행동들은 정말 많았는데요, 제가 과거의 일은 잘 기억을 못하는 편이라 이것 말고는 생각이 나질 않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만 들어도 충분히 이상하지 않나요? 자그마치 몇 주동안 계속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5. 아카카게, 사자(使者) (for. 자냐님)

 

 

 

 

   꿈결에 만난 적이 있다. 검은 정장에 검은 구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안개 속에서 내게 다가오던 이를. 처음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려주세요. 저를 찾아오신 이유도요.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가 더욱 가까이 왔다.

 

   그 향. 내 모든 것을 데려갈 것 같은 그 향을 처음 맡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느껴보았다. 익숙했다. 분명 어디서 맡아본 적 있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그것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아니, 익숙한 것을 넘어 너무나 사랑하던 모습이었다. 입을 차츰 벌려 그의 이름을 토해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꺽꺽대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답답했다.

 

   나의 힘겨운 모습이 그의 눈에도 처량했던 것인지, 얼굴 위로 흰 손이 포개어졌다. 전에 알던 온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차가웠다. 순간적으로 돋은 살갗이 그제서야 내게 위험을 경고했다. 도망쳐. 카게야마 토비오.

 

   고개를 흔들었다. 도망가기 싫어. 당신이 그 사람이 아니어도 좋아. 어쨌든 지금은 당신이 그 사람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사람은……. 조금씩 어지러워졌다. 연결되지도 않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뇌까렸다. 의식이 사라져 간다. 서서히.

 

 

 

   아카아시 씨.

 

  

 

   당신이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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