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 불륜소재. 토비오가 기혼인 상태입니다.
*도로롱님께 드리는 200팔 기념 리퀘이벤트 글입니다.
*영화 '화양연화' 의 틀을 일부 차용했습니다.
BGM : Yumeji's Theme (Extended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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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만남들의 시발점은 현재 살고 있는 멘션으로의 이삿날이었다. 짐이 꽉꽉 채워진 커다란 상자를 품에 가득 안고서 계단을 오르자,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와 양 옆으로 즐비한 대여섯 개의 문이 보였다. 건물은 대체적으로 낡은 편이었고, 뒤따라 올라오던 아내의 혀 차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복도 끝 창가에 있던 이의 존재를 못 알아차릴 뻔 했다.
그는 창문을 연 채 담배를 피던 중이었다. 흰 종이막대를 빨아들이며 머금었던 연기가 입술을 바끔, 떼는 순간 서로 뒤엉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꽤나 길게 공기를 가르고 흩어졌다. 겨울이니 충분히 추울 법도 한데,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반팔 티셔츠에 가벼운 추리닝 차림이었다. 개성 강한 탈색모에 담배.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어쩐지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그에겐 있었다.
"빨리 안 가고 뭐해? 나 팔 아파."
"아, 미안."
아내의 재촉하는 소리와 나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자, 그제서야 복도 끝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와 마주했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기체 사이로 그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확실한 것은, 그가 굉장한 미남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계단을 다 올라와 이사온 집 문 앞에 설 때까지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대 역시 입술에서 담배를 떼낸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여태껏 그에게 인사도 안하고 쳐다봤다는 사실이 상대에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계시는 거니까, 이 층에 사는 이웃이겠지. 나는 아내가 문을 여는 동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다시금 담배가 물린 입술과 여우를 닮은 그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과 우리 부부가 짐을 다 옮겼을 때는 벌써 밖이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큼지막한 가구들은 다 옮겼으므로 짐을 푸는 일만 남았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대충 방 구석에 처박아둔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워 눈을 가만히 감고 있자, 귓가에 철로 된 라이터 뚜껑이 챙,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흡연을 할 때마다 밖으로 나가는 게 귀찮다며 매번 방에서 불을 붙이는 게 습관이 된 아내는 새 집에서조차 그러했다.
"나 내일부터 다시 출장이야. 아마…… 일주일 정도."
그 말에 자동적으로 눈이 번뜩 뜨였다. 고개만 조금 돌려 그를 보자, 식탁 의자에 앉아 연기를 훅 불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전 복도에서 본 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사람의 혼을 빼놓는 듯한 안개. 그것이 다시금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사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자꾸만 무의식중에 되내이곤 했다. 그러나 당장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또?"
"'또' 라니. 누군 좋아서 가는 줄 알아?"
카나코가 담뱃재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최근의 아내는 많이 날이 서 있었다. 도대체 회사에선 무슨 출장을 그렇게나 보내는지, 결혼한지 겨우 1년 정도였음에도 함께 있었던 날보다는 떨어져 있었던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는 갈수록 쌀쌀맞아졌다. 서로 집안에서 등을 떠미는 바람에 반강제로 맺어인 인연이라곤 하지만, 어쩔 땐 내가 그의 인생에 걸림목이 되는 것 같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 채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미처 일기예보를 보지 못한 나는 회사에서 나와 부리나케 택시로 달려갔다. 하필이면 건물에서 맞은 편에 겨우 한 대가 있어서, 달리는 동안 그만 온몸이 쫄딱 젖었다.
가까스로 택시에 타고 나서 정장 자켓 안쪽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길었고, 나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저절로 끊기겠다 싶은 찰나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카나코. 혹시 5분 후에 우산들고 마중 좀 나와줄 수 있어?
-오늘 야근이야.
답은 간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에도 온갖 귀찮음이 묻어나와, 전화기를 더 붙잡고 있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 피곤할텐데 쉬어가면서 해. 돌아오는 말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급하게 멘션으로 뛰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머리는 무수히 많은 빗방울을 머금은 채였다. 손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계단을 오르자, 바닥에 깔린 융단 위로 물기가 뚝뚝 흘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깨부분이 푹 젖은 정장부터 손봐야 할 참이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복도를 걸어가며 가방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어디다 뒀더라…… 문 앞에서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자, 갑자기 옆집에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 카게야마 군?
놀란 토끼눈을 한 채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이사 온 날 이후로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금발의 사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사람 옆집이었던 건가. 이번엔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날처럼 똑바로 보기 힘든 느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지금 들어오는 건가요?"
"네. 그나저나 제 성은 어떻게...?"
여기 있잖아요.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문과 문 사이의 문패를 향했다. 헤진 나무토막 위에 '카게야마' 라는 글씨가 깊게 패여 있었다. 괜히 민망해져 뒷목을 쓸자, 그가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괜찮다면 지금 나랑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아, 제가 지금 머리도 말려야 하고…… 또 정장도……."
"우리집에서 하면 되죠. 간만에 실력발휘 좀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졌지 뭐야."
우선 보기에 선해보이는 미소는 '이웃과 친해지기' 말고는 다른 의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말을 나눠본 사람이긴 하지만……. 카나코는 오늘 야근이랬고, 어차피 오늘 저녁은 혼자 먹을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실례 좀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카레 좋아해요?"
"아, 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걸요."
다행이네- 처음 말을 튼 것과는 다르게, 그와의 대화는 매끄러웠다. 어쩌면 카나코와의 대화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주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이미 꺼내져 있던 그릇 두 개가 눈에 띄었지만, 별 다른 의문은 들지 않았다.
그는 큼지막한 국자에 노란 카레를 가득 떠 그릇에 퍼 둔 밥 위로 사르르 부었다. 밥알 사이로 먹음직스럽게 스며드는 모양이 절로 침을 꿀떡 삼키게 만들었다.
"아 참. 머리 말려야 하지 않아요?"
"네?"
"비 엄청 맞은 것 같던데, 밥은 그렇다치고 머리 먼저 말려요. 화장실에 수건이랑 드라이기 있어."
"아 그럼, 화장실 먼저 빌릴게요. 감사합니다."
화장실은 우리 집의 것과 유사했다. 네모나게 갈라진 아이보리색 타일, 하얀 세면대, 욕조. 천장에 달린 커튼만 아니었다면 우리집 화장실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변기 위의 캐비넷에서 빳빳한 면수건을 꺼내 머리를 닦고 있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카게야마 군. 이름이 뭐예요?"
"토비오 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예요."
아- 토비오 군? 익숙한 듯 이름을 부르는 모양새가 생각보다 영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벌써부터 친해진 기분이 들어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난 미야 아츠무. 편한대로 불러요."
미야…… 아츠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조용히 불러보았다. 이름과 얼굴이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말린 후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그가 먼저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죠. 괜찮으니까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첫날 본 미소가 또다시 나타났다.
"그나저나 나이 비슷해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스물 일곱입니다. 미야 씨는요?"
"스물 여덟. 한 살차이네. 말 놓을까 우리?"
컥. 카레와 함께 넘어가던 밥알이 목구멍 한 켠에 턱하니 걸렸다. 다급히 목을 쥐며 켁켁대자 미야 씨가 미리 준비해둔 물을 건넸다. 괜찮은 거야 토비오 군? 그가 얼굴을 쑥 내밀며 물었다.
"으, 괜찮…… 읏……!"
계속해서 목을 간지럽히는 기운에 물기 어린 눈가를 쓸고 앞을 보자, 미야 씨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있었다. 길게 잡아봐야 10센티는 될까. 그와 나 사이에 흐르던 기류들이 서서히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의 짙은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날렵하게 올라간 코, 가지런히 다물어진 입술도. 그리고 내가 눈을 뗄 수 없게 꽉 옭아매는, 눈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안에서 들끓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비오 군."
"……네."
"이삿날 말이야, 같이 있었던 사람."
누구야? 나른한 목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낮게 퍼졌다. 아마 카나코에 대해 묻는 것이리라. 나는 왠지 그 질문이 불편했다.
"...그게... 배우자 입니다."
"배우자?"
"네."
"되게 남 이야기 하듯 말하네."
그가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아까와 같이 웃고 있지는 않았다. 별 표정은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나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 놓인 카레만 한 술 떠먹었다. 짧은 시간동안 답답해진 공기가 어떤 행동이라도 하라는 듯 부추기고 있었다.
미야 씨는 그 후로 카레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쇠로 된 라이터의 뚜껑을 여닫았다. 캉- 소리가 날 때마다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은 단 한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 그나 나나. 누군가에게 카나코와 나의 사이를 소개할 때마다 들던 생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잘 먹었다며 고개를 숙이자 그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 그가 사과하며 옆으로 다가섰다. 그에게서 어딘가 진한 스킨 향이 났다.
"카레는 어땠어, 토비오 군? 맛있었어?"
"네, 물론……!"
"그럼 다음에 또 와. 혼자 저녁먹기 쓸쓸하니까."
그가 첫날처럼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배웅했다.
사실 아까 그의 질문은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것. 나는 괜한 기분을 떨쳐내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태 입고 있던 얇은 셔츠 단추를 툭툭 풀어내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아내가 담배와 함께 마시던 양주 반 병, 빈 담뱃갑, 그리고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담뱃갑을 손에 쥐자 상호명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등에 비쳐 빛나는 이름은, 비흡연자인 나도 어디선가 자주 들어본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생활 처음으로 아내가 피는 담배의 이름을 알았다.
†††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얼마 후 나는 집 근처에 자리잡은 작은 슈퍼에 들어가 담배 하나를 구입했다. 카나코가 피우던 것과 같은 것으로, 종류에 대해 아는 것이 지극히 한정적이었던 나는 그것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슈퍼에서 나와 담뱃갑의 옆면을 보자 니코틴과 타르의 수치가 나와있었다. 그 역시 아는 바가 없던 나는 괜찮겠지, 하고는 멘션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와 같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기 전 옆집을 흘끔 쳐다봤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착각이었을까.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여전히 적막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 산 담배의 비닐을 뜯었다. 그러자 가지런히 정렬된 흰 막대기들이 꼭 하나 뽑아가고 싶게끔 빽빽이 붙어있었다. 라이터는 집을 조금만 뒤져도 나왔으므로, 아내가 조잡스러운 물건을 한데 모아두는 바구니를 뒤적거려 찾아냈다. 그가 좀처럼 쓰지 않는 싸구려 술집 라이터였지만, 기름은 넉넉히 차 있었다.
그대로 침대로 달려가 붕, 소리와 함께 몸을 내던졌다. 그리곤 전에 카나코가 하던 모습을 기억해내, 수차례만에 불을 킬 수 있었다. 조촐하고 뜨거운 불길이 한순간 위로 훅 치솟는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막대기의 끄트머리를 그것에 갖다댔다.
동시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나는 듯 안 나는 듯 약한 연기가 위로 피어올랐다.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입술 사이에 갖다대어 본다. 곰팡이 쓴 천장을 바라보며, 깊게 들어마신다. 깊게, 깊……
"케엑-!!!"
한 번 빨아들이기만 했는데도 목구멍을 가득히 메우는 매운 연기가 숨을 가득 옥죄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맛, 향. 대체 이걸 왜 피는 거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애꿎은 담배를 노려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자리한 막대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아래를 갉아먹고 있었다. 물질을 연소시키며 내는 연기에 가만히 옆집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사람이 할 땐 멋있어 보였는데.
무의식에 잠긴 머리는 손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가만히 침대 옆에 붙은 벽을 손으로 지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 쯤 타들어간 막대가 낡아서 드문드문 벗겨진 벽지에 짓이겨지고, 맥락없이 죽고, 약하게 탄내가 난 후에야. 깜짝 놀라 얼른 담배를 떼냈지만 벽은 이미 탄 자국이 선연히 남아있었다.
카나코. 카나코가 집에 와서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낡은 집에 탄자국까지 내다니. 얼마나 야단치겠는가. 나는 그 생각에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던 재떨이에 타고 남은 담배를 내던지고, 어떻게든 해결할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부산스러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카나코가 이번에도 출장 가 있겠다고 한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이쯤되면 따로 사는 거 아닌가. 나는 유난스레 굴었던 몇 초전의 자신이 민망해 다시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가벼운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곧바로 옆집의 문을 두들겼다.
쿵쿵쿵.
크게 두드린 뒤 가만히 기다렸다. 나오면 나오는대로 마주하고, 나오지 않는다해서 더 두드리지는 말자. 충동적인 행동과 함께 떠오른 양심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어쩌면 기대한대로-집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집에 그가 있는 것이다.
얼마 안 가 문은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조금 피곤해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그제서야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 주, 주무시고 계셨나요?"
"……."
"죄송합니다! 계속 주무셔도……."
나의 서투룬 사과에 그는 말없이 문을 더 활짝 열기만 했다. 조금 잠이 오는 것 같긴 했어도, 얼굴은 나긋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들어와도 돼, 토비오 군."
"어, 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밥 먹으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
"난 토비오 군 언제든 환영이야."
잠긴 목소리가 복도를 가르고 귀에 정확히 꽂힌다. 나는 첫날처럼 홀리는 기분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문이 닫히고 좁은 현관문 앞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건만, 미야 씨가 숨이 닿을듯한 거리에서 날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서였다. 발은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한 채 옴싹달싹했다.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기란 꽤 힘겨웠다. 그래서 나는 어색해진 눈을 아래로 둔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쿵쿵. 심장이 크게 뛴다.
"왜, 그렇게……."
"토비오 군."
"……네."
"이렇게 있는 것도 좋은데 말야."
뭐, 가……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한 날 그에게서 맡은 향이 또다시 느껴졌다. 시원한데 어딘가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손에 든 걸 보니 나가는 게 좋겠지?"
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의 집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온몸이 펄펄 끓을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발걸음은 내가 그를 처음 본 날, 그가 서 있던 곳을 향했다. 복도 끝 창가 앞. 나는 미야 씨보다 앞서 뚜벅뚜벅 걸어 창문을 홱 열어젖혔다.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건조한 볼을 할퀴며 불어왔다.
"토비오 군은 이거 안하는 줄 알았어."
그가 내 손아귀에서 담뱃갑을 쑥 빼앗으며 말했다. 그리곤 자연스레 안에서 하나를 꺼냈다.
"……미야 씨가 가르쳐주세요."
"뭘. 이거 말야?"
"네."
"어렵지 않아. 근데 이유를 알고 싶은데, 나는."
"그건…… 그냥. 그냥입니다."
별 이유 없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의 첫인상이 계속 뇌리에 남아 궁금해졌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흐음- 하며 눈썹 한쪽을 슬쩍 올리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처음부터 쎈 걸 골랐네."
"아, 그런 겁니까?"
"괜찮아. 나도 이거 펴."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내게서 라이터도 빌려가, 자연스레 불을 붙였다. 그는 나와 다르게 한번에 불을 킬 수 있었다. 능숙한 손짓이 괜히 쳐다보고 싶게 만들었다. 하나 꺼내서 붙여봐. 그가 상냥히 말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아까와 같이 옹기종기 모인 막대 중 하나를 꺼내, 서너 번의 시도 끝에 불을 붙였다. 이제 이 다음이 문제였다. 입에 걸치기는 했는데, 여기서 정확히 더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잘 봐, 토비오 군."
굳이 처음부터 들어마실 필요는 없어. 입 안에 잠시 머금었다가, 뱉는 거부터 하면 돼. 그가 막대 끝을 후욱 마셨다. 그리곤 속에 모아두는 듯 입술을 꾹 닫었다가,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구름같은 연기를 뱉어냈다. 그것은 창문에서 불어오눈 바람의 방향을 따라 복도 안쪽으로 휘날렸고, 어지러이 흩어져갔다. 안개가 다 사라진 후의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몽롱해보였다.
그가 따라해보라는 듯 내쪽으로 턱짓 했다. 그에 나는 기둥 부분을 두 손가락으로 지탱하고, 용기있게 빨아들인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목구멍으로 훅 들어가기 전에, 혀로써 입구를 막는 것. 가까스로 입 안에 가득 머금었다. 미야 씨에게 얼굴이 붕어빵처럼 보일까 괜히 신경쓰였다.
"옳지. 그리고, 천천히 뱉어 봐."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속삭였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복도를 향해 후으- 내뱉었다. 힘있게 빨아들인 통에 연기가 넓게 퍼지며 큰 구름이 되었다 사라진다. 성공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나머지 연기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를 휙 돌아봤다.
"미야 씨, 저 성공……!"
순식간에 앞이 차단당했다. 내가 무어라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덥썩 덮었기 때문이었다. 붉고 조금 거칠어보이던 입술은 함께 닿자마자 놀랍도록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의 양 손은 내 뒷목과 등을 지탱하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덜 빠져나간 연기가 상대에게로 옮아간다. 놀랍게도,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다 느끼지지 않는다. 그저 함께 눈을 감고 들어오는 혀를 당연한 듯 마주비빌 뿐이었다. 미적지근했던 내 혀와 뜨거웠던 미야 씨의 혀가 만나 일정한 온도를 찾은 후에도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키스가 계속 되었다. 우습지만 카나코와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둘이 식사를 한 날. 나는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의 질문이 불편했던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그가 오래토록 혀와 배를 맞비빈 뒤, 내가 정말 숨이 막혀 얼굴이 벌개진 후에야 가까스로 떼어냈다. 그의 눈가와 볼 언저리가 붉었다. 입술은 아까보다 조금 더 도톰해진 것 같다. 나도 그럴까. 열이 올라 잔뜩 달뜬 숨이 그에게 그대로 닿고 있었다.
"토비오 군."
"하아, 하……."
"네 배우자라는 사람 말야."
"……."
"몇 시간 전에 다른 남자랑 모텔로 들어가는 걸 봤거든."
순간 어깨가 움찔, 하고 경직해버렸다. 카나코에 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지금 토비오 군 놓아주면, 거기로 갈 거야?"
"……."
"응? 토비오."
그가 처음으로 내게 종용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그만 어찔해진다. 싫어요. 싫어.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요. 그만 두고 싶어. 그의 품에 그만 머리를 푹 박아버렸다. 품 안 가득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더 이상 카나코와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로 넘어가고 싶었다. 미야 씨의 세계로. 매일 오지 않는 아내를 의무감으로 기다린 날도, 다른 남자와 있을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던 날도, 사랑받길 바란 적 없지만 내게 너무나 무심했던 날들도……. 그라면 도와줄 수 있었다. 아니, 내가 그럴 수 있었다.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과는 반대로 우리는 충분히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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