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관계
※폭력, 사망요소 有
※종교적인 내용이 약간 있습니다.
※스토리상 쿠니미를 카게야마보다 한 살이 많은 빠른년생으로 두었습니다.(약간의 연령반전)
*BGM : 영화 '아가씨' OST, 조영욱과 soundtrack - 좋기만 한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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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일용할 양식
차렷. 오늘도 우리에게 소중한 양식을 제공해 주신 원장님과 선생님들께 경례. 기다란 탁자들이 즐비한 식당에서 회장-이라 불리지만 실상 원장의 앞잡이인 녀석-이 앉아있는 아이들 사이에 혼자 우두커니 서 우렁차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있던 아이들 모두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 대답했다. 회장은 저를 기다리는 수많은 눈들을 즐기며 일부러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는 한참동안 숟가락으로 국을 휘젓기만 했다. 다들 기다리느라 굶주림에 조금씩 지쳐갈 때 즈음에 그가 야비한 미소를 띄우며 비로소 입으로 음식을 흘려보내면, 그제야 식당 곳곳에서 수저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회장이 음식을 먼저 먹고 나서야 다른 이들도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제 따위는 이미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철저한 계급사회가 이루어진 이곳은 다름아닌 일본 미야기현의 북동부에 위치한 기타카미보육원으로(이름은 근처 산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은-혹은 애초부터 가족의 행방이 묘연한-아이들을 거두어 키우는 곳이다.
하지만 말이 '보육원' 이지, 열악한 생활환경이나 폭력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육원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앞서 확인했듯이 이곳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당연하게도 보육원의 원장이 있었고, 그 바로 아래로는 이곳에 고용된 몇몇의 선생님들, 그리고 회장 순이었으며 나를 포함한 나머지 미성년의 아이들은 원장의 상품, 혹은 노예와 다름없었다. 상품으로 분류되는 아이들은 이따금 정부에서 사람들이 내려올 때, 우리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주는 일종의 샘플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다른 애들보다 피부가 희고 잡티가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비록 쿰쿰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다른 애들도 다 먹는 맹죽이었지만 뺀질뺀질한(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외관이 마치 잘 먹고 잘 자란 아이같이 보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샘플이 되는 날은 아주 드물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받는 이러한 도구취급에 딱히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원장의 상품에 해당되지 않는 녀석들의 부러움이 담긴 눈길을 이제는 자연스레 넘길 뿐이었다.
그렇다면 노예란 무엇이냐.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 모두가 노예에 해당되었다. 상품인 녀석들, 그러니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저 노예의 위치에 있는 녀석들보다 가끔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을 뿐,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똑같이 청소하고, 일을하고, 맞았다. 다들 회장을 포함한 상위에 있는 인간들에게 맞는 일이란 아주 당연한 일이어서 그 누구 하나 들고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기억이 없을 때부터 자라왔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원장이나 선생이란 것들을 모두 이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결국 항상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회장 뿐이었다. 우리가 도대체 언제 끓인 건지도 모를 맹죽을 삼킬 때, 회장은 늘 선생들이 먹는 음식과 같은 것으로 먹었다. 성질이 고약한 이 녀석은 원장의 개였으며, 간신이었다. 원장이 지시한 그 어떤 질나쁜 짓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날조해 원장이 우리를 더욱더 학대하기까지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맞았다. 물론 상품의 위치에 있으니 얼굴이 있는 곳은 웬만해서 손이 오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온통 멍 투성이었다. 내가 다른 애들보다 사고를 많이 친다던가 실수를 자주 한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원체 눈에 띄는 것을 꺼려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인 나는 오히려 얌전하기로는 이곳 기타카미에서 제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유는 결국 외부의 것으로,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장이 유독 나를 어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동시에 나로 인해 자신의 자존심에 흠집이 나는 것은 또 이상하리만치 분개해했다. 그래서 자신이 벌인 잘못들을 마치 내가 한 양 원장에게 일러바치기 일쑤였고, 당연히 원장은 그럴 때마다 폭력으로 나를 다그쳤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맞고있으면, 회장은 선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위로따위나 받고있었다. 가당치도 않았다.
다른 하나는 지금 바로 내 옆에 앉아 숟가락으로 죽만 휙휙 젓는, 이 애에게 있었다.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어릴 때 부터 우리는 서로를 형제라고 여기며 자라왔다. 둘 다 완전히 갓난애기 때부터 이곳에서 자라, 그저 원장이 우리가 형제라하니 그런 줄로만 알고 지낸 것이다. 다만, 이곳에 있는 애들 중 다른 집에 입양 보낼 기회가 있으면 한번에 보내기 위해 짝을 맞춰 형제로 묶은 경우가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우리도 그 인위적인 짝들에 포함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사실인지는 몰라도 형제라는 이유로 줄곧 붙어다닌 우리는, 자연스레 깊은 감정이 틀 수 밖에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선생과 원장이 손님만 오면 떠들어대는, 우리 형제간의 우애 쯤이라고만 짐작 할 뿐이었다. 나이는 내가 한 살이 더 많았고, 내 동생은 재생불량성 빈혈이라고, 영 생소한 이름의 병을 앓고 있다. 듣자하니 일반 빈혈과는 달라 자칫하면 골로 갈 수도 있을정도로 위험한 병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애가 맞을 양까지 대신 다 맞아왔다. 몸이 하도 약해 죽이 든 그릇조차 부들거리며 받는 애였기 때문에, 내가 원장에게 직접 가 이 애를 그만 때려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인간은 허락하지 않았다.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다 내가 대신 벌을 받는 게 어떻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원장은 그러기를 권했다. 까딱하면 생명줄이 끊어질까 간당간당한 카게야마의 건강이 원장도 필시 신경쓰였던 것이다. 이 일화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쉽게 다른 집에 입양보내지지 않았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나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의 형제인 이 애가 질환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잘 진행 중이던 계약도 십중팔구 철회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애들 키우면서 나가는 비용 정도는 예상하고 왔는데, 아픈 아이라면 병원비만 해도 만만치 않겠어요- 따위가 그 이유였다. 어쨋든 카게야마나 나나 아주 새로운 환경에 간다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으므로 다행이었다. 물론 이곳이 좋다거나 정이 들었다거나의 이유는 아니고,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것 보단 차라리 둘만 따로 떨어져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장대한 계획과 함께 남몰래 자금을 조금씩 모으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자금을 구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용쓰지 않아도 내 손에 자연히 들어오는 돈들은 이곳을 찾은 이들 중 아주 가끔 맛있는 걸 사먹으라며 용돈을 쥐어주는 경우 뿐이었고, 원장은 그 인물이 떠나는 즉시 받은 돈을 빼앗아 갔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원장의 사무실을 터는 것.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나도 꽤나 고심을 했다. 만에하나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맞는 것으로 끝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 전 주방에 몰래 가 선생과 회장만이 먹는 음식에 손을 대다 회장에게 딱 걸린 녀석을 기억했다. 이후 그애는 지하창고에 갇혀 이틀가량 햇빛 한번 보지 못했다. 음식과 물 또한 제공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애는 아사하기 직전에야 겨우 식당으로 와 죽을 뜰 수 있었다. 음식 좀 훔쳐먹었다고 감금이라니. 아마 내가 원장실에 몰래 가 돈을 빼온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당최 가늠이되지 않았다. 분명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에게 내리는 일종의 경고였다.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영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후폭풍이 신경쓰이기는 하지만, 원장이 생각보다 꽤 빈틈이 많은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장이 사무실을 비우는 시간은 대체로 규칙적이었다. 나는 원장이 사무실을 비우는 그 틈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원장이 업무를 보는 3층은 빈 방들이 많았으므로 계단에서 울리는 구두굽 소리를 듣는다면 어디로든지 숨기 좋았고, 원장은 매일밤 자신의 방에 가서 잠들었기 때문에 밤에는 사무실에 누군가가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들 중 하나를 시켜 원장실을 지키게 할 법도했지만 멍청한 원장은 안타깝게도 그런 방법은 떠올리지 못한 듯 했다. 나에겐 감사할 정도로 다행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원장실 청소를 맡은 녀석만이 매번 의심을 샀고, 알리바이가 있었어도 손찌검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벗어난 후 돈이 모자란다면 동생의 약값을 당장에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만 했다.
이쯤되면 내가 이곳의 상품이나 노예인 것 치고 꽤나 많은 것을 -특히 우리가 불의에 당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을- 알고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정확히 본 것이다. 이곳에서 상품이 되는 것이 좋은 이유는, 비단 가끔 내게 주어지는 맛있는 음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에서 온 사람들 앞에서는 멋진 연기가 필요했다. 나의 역할은 학업에 관심이 많은 똑똑한 아이였고, 남들에게 장차 큰 아이가 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핑계로 늘 책 읽는 모습만을 보여주어 왔다. 가끔 이곳을 찾는 이들 중 보육원 밖에서 일어나는 사회를 보여주는 유익한 책을 선물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닥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다 판단한 원장은 책만큼은 뺏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똑똑한 척을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덕에 나는 텁텁한 죽을 입에 담는 지금조차도 장차 모으게 될 돈을 어디다 분배할지 고민할 수 있었다. 나는 식탁 밑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앞으로 더 모아야 할 돈을 계산하다, 무심결에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나뭇가지 마냥 비쩍 마른 손모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약간 헤진 소매 끝이, 그 위로는 보기에도 퍽 안쓰러워 보이는 앙상한 어깨가. 토비오, 그러니까 내 동생의 갸냘픈 몸이었다. 들쭉날쭉한 앞머리가 죽이 담긴 그릇에 닿일 듯 말듯 해, 뒤로 등을 잡아당겨 허리를 곧추 서게 했다. 똑바로 앉는 것조차 버거운 듯 어깨가 살짝 처지는 것이 보였다. 토비오의 숟가락은 죽을 뜨다말다 할 뿐 좀처럼 입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카게야마."
"……응, 형."
나는 차마 그 애에게 더 먹으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죽이 얼마나 더러운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자칫 운이 안 좋으면 -실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정체모를 커다란 벌레가 죽이 담긴 숟가락 위에 둥둥 떠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애에게 멀쩡한 음식 한번 제대로 먹여본 적이 없음에 늘 자책했다. 가끔 좋은 음식을 먹는 날이면 남몰래 과일이라도 한 두개 쯤 챙겨올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아니라는 말과 함께 다시금 한 입 떠먹었다. 죽인지 가레인지도 모를 비릿하고 쿰쿰한 것이 입 안을 가득채웠다.
*****
건물의 모든 형광등은 저녁 아홉시 반이 되자 소등되었다. 원장과 선생들, 그리고 회장을 포함한 모두는 취침시간과 기상시간 모두 일렀기 때문에 보통 열 시가 되기 전 빠르게 잠이 들었다. 방의 입구쪽에 이불을 깔고 누은 나는 주위에서 코 고는 소리가 따랑따랑 들려올 때까지 뜬 눈으로 버텼다. 이따금 옆에서 새근새근 들리는 토비오의 따끈한 콧김만이 옷을 통과해 내 등을 적셨다. 나는 혹시나 깨어있을 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경계하며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문 근처 벽에 달린 시계가 째깍째깍 요란하게도 움직였다. 늦게까지 깨어있는 게 습관이 되어 다행히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곤혹이었다. 더이상 몸이 근질근질해 못 참겠을 즈음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찌푸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덮고있던 얇은 이불을 걷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한창 단잠에 빠진 녀석들이 이리저리 뒹굴어다니고 있었다. 반장은 애초에 다른 방에 가 홀로 잠을 자는 놈이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남몰래 미리 살짝 열어둔 문틈에 손을 비집고 넣어 몸만 살며시 빼내었다.
문을 살짝만 열어둔 채 복도로 나오자 저끝에 위치한 창문으로 달빛이 흐붓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몰래 챙겨나온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는 조심스레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꽤 낡은 목조건물이었으므로 걸을 때마다 날 소음을 조심해야했다. 자칫 발을 잘못 놀리면 삐그덕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때에도 조심성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썼다. 난간에 손을 짚는 것 조차도 두려웠다. 그정도로 낡은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반 정도를 올라갔을까. 별안간 위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워낙 조용히 말하고 있어 듣지 못할 뻔 했지만, 다행히 주위가 고요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원장실인 것 같았다. 의아하다고 생각한 나는 우선 언제 원장이 사무실을 나올지 모르므로 비어있는 원장실 옆방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먼지 쌓인 가구들이 모여있는 창고용 방 같았다. 나는 먼지 때문에 일어나는 재채기를 억지로 코 끝을 잡아 참고는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였다. 낡은 것이 계단과 바닥 뿐만이 아니었는지, 벽 너머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대충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똑똑한 애라니까요, 네. 믿으셔도 좋아요. 그런데 저희가 그애 동생되는 애를 키우느라 돈이 좀 들어서요. 아시다시피 몸이 약한 애라……. 괜찮으시겠어요?"
어쩐지 남일같이 않은 내용에 귀를 더 바싹 벽에다 붙였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럼요, 그 애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하실 거예요. 오이카와가(家)의 고귀하신 분께 걸맞는 아이죠. 어디가도 실망은 시키지 않을거예요. 네. ……네, 그렇게 하죠. 그럼 다음주중에 오실건가요?"
원장의 목소리는 그 뒤로 네, 네를 몇번 더 하고는 완전히 멈췄다. 누군가와의 통화소리 같았다. 그런데 이런 야심한 시각에 깨어있다 몰래 하는 전화라니. 열 시 전에는 무조건 골아 떨어지는 평소와는 영 다른 모습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시각에 전화라면, 꽤나 비밀스러운 대화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벽에 붙이고있던 귀를 떨어뜨리고 망가진 책상 아래에 숨어 원장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실의 문이 열렸다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예의 그 차가운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내가 숨어있던 방 앞을 지나쳤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까지 들리고나서야 방을 슬며시 나온 나는 늘 챙겨다니는 옷핀을 꺼내 원장실 문 앞으로 갔다. 더이상 3층으로 누군가 올 리는 만무했지만 행여나 누구라도 마주칠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뒤는 고요한 달빛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평소처럼 열쇠구멍 안으로 핀의 바늘 구멍을 넣어 이리저리 돌리고 쑤셨다. 그러면 익숙한 소음과 함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이 열린 방 안은 어젯밤과같이 고요했다. 딱 봐도 화려해보이는 카펫부터 가구, 소품들이 정신 사납게 나열되어 있었다. 돈만 많았지 보는 눈은 쥐뿔도 없는 인간이었다. 방 한 가운데에 위치한 책상에 다가가 은은한 빛의 주확색 스탠드를 켰다. 창문에는 암막커튼이 쳐져 있었으므로 빛이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바퀴가 달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잠시 이 스릴을 만끽했다. 나는 지루한 보육원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이 감정을 흠모했다. 낮에는 매번 일하고 맞느라 다른 것에는 정신을 둘 여유도 잘 없었지만, 밤이 되면 조금 분답긴 해도 이 비싼 가구들 속 이렇게 푹신한 의자에 저만(원장을 제외하고) 앉을 수 있다니 이건 정말,
"……환상이네."
조용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방을 가득 매웠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다리를 앞뒤로 흔들다, 곧 몸을 일으켜 책상 밑에있는 서랍들을 손으로 더듬었다. 맨 밑 칸에 있는 차가운 열쇠구멍이 손에 느껴졌다. 아까 쓴 옷핀을 다시금 꺼내 구멍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리고, 다시 돌아와서 안으로. 그리고……. 매일 해왔던 일은 지워지지 않는 잉크처럼 손에 묻어 자연스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열린 서랍에는 오늘 낮에 원장이 인출한 현금 몇 만원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한꺼번에 가져간다면 바로 내일 아침 난리가 날 것이 뻔했으므로, 두꺼운 종이뭉치 중 몇 장만 빼내어 잠옷바지의 고무줄 부분에 끼워넣었다. 그리곤 서랍을 다시 잠그는 것도 잊지 않고 깔끔하게 방을 나서려고 했다. 전화기 옆에 있는 명함만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렌지빛 스탠드 아래에 금박 테두리로 꾸며진 명함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 전화한 내용이 신경쓰여 얼굴에 가까이대어보았다. 세이죠 재단. 오이카와 토오루. 아까 원장이 대화 중 언급했던 성이었다. 나는 세이죠, 세이죠 하고 머리에 새겨두고는 원래있던 자리에 명함을 그대로 두고 방을 나섰다.
예상보다 계획이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